[아이티비즈 박시현 기자]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가 19일, 열한 번째 영림원소프트랩 차세대리더포럼에서 강연했다. 1920년에 태어나 올해 104세가 된 김 교수는 ‘김형석 교수에게 듣는 인생 이야기 -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주제의 이번 강연에서 “지난 세월 살면서 참 고생도 많이 했지만 사랑이 있는 고생이어서 행복했다”고 백년 인생의 값진 교훈을 들려줬다. 다음은 강연 내용
◆도산에게 강연듣고 정신적 지도자 되겠다는 꿈 가져 = 일제시대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다행스럽게 윤동주 시인과 황순원 작가와 함께 공부했다. 그들은 무엇이 되겠다는 꿈이 확실했다. 그렇지만 나는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설계할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지금으로 보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신사 참배 때문에 학교를 떠나게 되고 어떻게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강연을 듣게 됐다. 그 강연을 듣고 철학을 공부해 교육계에 머물면서 정신적 지도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
대학(연세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평안남도 대동)에 돌아왔는데 젊은이들이 학도병으로 일본 군대로 끌려가고 경찰들이 뒷조사하는 자유롭지 못한 참 불행한 젊은 시절이었다. “내 나라에서 살아봤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 해방을 맞이했다. 마침내 내 나라에서 살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북한에서 산 2년은 내가 원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해방되고 한 달쯤 지나 초등학교 선배였던 김일성 장군을 만났다. 우리나라가 이제 어떻게 됐으면 좋겠냐는 얘기를 했는데 김일성은 첫째 친일파 숙청을 하고, 두 번째는 모든 국토를 나라가 가지며 개인 소유는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오랜 후에 북한에 있는 지도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이 식당은 국가가 하는 것이냐, 개인이 하는 것이냐”라고 묻길래 개인이 한다고 했더니 북한에서는 개인이 식당을 못한다고 했다. 북한에는 사상의 자유가 없고 문학이 없고 종교가 핍박을 받았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27세 때 38선을 넘어 서울에 와서 7년 동안을 중앙중고등학교에서 보내게 됐다. 그 때 나한테 두 가지 책임이 주어졌다. 하나는 정신적 지도자가 될 만한 지식과 학문을 갖추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인격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여러 선생을 만나 배우면서 내 인격도 그 수준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을 만나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동안 만난 선생들이 야산이었다면 도산과 인촌은 거봉이었다. 도산과 인촌만큼의 인격을 갖춰야 사회 지도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인촌 선생을 모시며 정말 많이 배웠다.
◆인촌에게 배운 세가지 가르침 = 인촌은 일제시대 그 어려운 때에 고려대학교를 세우고 총장은 다른 선생에게 맡겼으며, 동아일보를 정성껏 키워놓고도 친구인 송진우에게 “당신이 나보다 유능하니까 사장을 좀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사람이 인격을 키우는데 정신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만 하면 사회에 나가서 큰일을 많이 하기 어렵다. 인촌은 사회적으로도 높은 인격을 갖췄다. 이승만 박사는 자유민주주의의 길을 열어놓았지만 독재 정치 때문에 불행해졌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를 불행으로 이끈 것은 그 비서들이었다. 이승만 박사는 너무 답답해서 누구를 만나 얘기할 사람이 없나 해서 친분이 있었던 허정(당시 외무부 장관으로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과도정부에서 대통령 권한 대행 맡음)을 찾았는데 허정은 왜 그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냐고 묻자 이승만 박사는 비서들 때문에 올 수가 없었다고 얘기했다.
인촌을 보면서 느낀 것은 세가지였다. 첫째 인촌은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지 않았으며, 이기적인 목적으로 아첨하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다. 두 번째로 인촌은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에 절대로 편 가르기를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편 가르기를 하면 편협해지고 전체적으로 생각을 하지 못해서다. 나도 그동안 쭉 살아오면서 편 가르기가 우리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인촌은 “나보다 유능한 사람이라고 인정될 때에는 밀어주자”고 했다. 나는 연세대학교에서 30여 년 재직하는 동안 두세 번 교무처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더 유능한 교수를 찾아보면 있을 것이라고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별 감투가 없다. 어디 가서 나를 소개하게 되면 중앙중고등학교 교사, 연세대학교 교수밖에 없다.
고려대학교 김성식 사학과 교수가 얘기한 게 생각나는데 “인촌이 살아계실 때 야당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가 되었는데 돌아가시자 야당이 하나가 될 길이 없어졌다”는 말이었다. 한 사람의 인격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요즘 무한 경쟁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어떤 인간관계를 맺어야 할까? 어디에 가든지 경쟁은 있기 마련이다. 갈등과 경쟁이 없으면 성장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인촌은 개인의 출세와 성공을 위한 이기적인 경쟁은 하지 말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 이기적인 경쟁을 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이기주의자는 자기도 불행하고 사회와 직장도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니 이기적인 경쟁 대신에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선의의 경쟁을 하면 져도 박수를 쳐주고, 이겼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다. 우리 국회의원들이 월드컵 경기에 나가는 선수만큼 선의의 경쟁만 하면 나라는 달라질 것이다. 그 경쟁도 사랑이 있는 경쟁을 해야 한다. 애들도 많이 키워보고 교수 생활도 오래 했지만 제일 행복한 것은 아들딸들이 부모보다 잘 되는 것이다. 아들딸들을 이기주의자로 키우면 그 자녀들은 사회에 나가 실패한다. 사회에 나가서 봉사하는 것을 키워줘야 한다.
나는 안병욱 선생, 김태길 선생에게 많이 배웠다. 셋은 다 동갑이고 철학교수로 50년 동안 쭉 친구로 지냈다. 우리는 서로 친구가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 친구가 나보다 더 좋은 저서를 남겨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그러면 철학계가 올라가고 우리 사회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바람에서였다.
얼마 전에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기도가 일간지에 나왔다. 그런데 도산 선생의 마지막 기도나 인촌 선생의 마지막 기도가 똑같다. 그 기도는 “그동안 나라와 국가를 위해 일했지만 이제는 늙어서 일을 못하겠으니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맡아 좋은 나라로 키워 모든 국민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세분은 바로 사랑이 있는 경쟁을 했다. 누가 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가, 누가 더 우리 직장을 사랑하는가, 누가 더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인가에 대한 경쟁이다.
◆60에서 75세까지가 인생의 황금기 = 6.25 전쟁을 치르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인간을 키우는 교육은 중고등학교가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대학에 가게 되면 사상적 활동 분야가 더 넓어질 것이며 전쟁을 마친 우리나라가 한 단계 올라가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서 대학으로 갔다. 한 학기 동안 세 대학에 시간 강사를 하고 이후 전임으로 연세대학교에 가게 됐다. 연세대에 가게 된 것은 연세대학교 학생이 된 중앙중고등학교 제자들이 중학교 때 나에게 들은 강의가 좋았는데 또 그런 강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덕분이었다. 한 학기를 끝내고 연세대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인간적으로도 이제 사회에 나갈 만한 내 자신이 된 것 같았고 학문적으로도 인정해 주어서 30여 년 동안 행복하게 일했다.
30대 중반에 연세대학교 교수로 가서 원로 교수들이 정년퇴직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65세까지 일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내가 회갑이 되자 주위에서 자꾸 늙었다니, 또 건강은 괜찮은지 걱정을 해줬다. 정년까지 남은 5년 동안 열심히 일해 잘 마무리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5년 동안 참 일을 많이 했다. 65세가 되어 학교에서 나가게 됐다. 학교에서는 이제 후배들에게 맡겨주고 가정에서 손주들 데리고 편히 살라고 했지만 앞으로 인생이 한단계 떨어질 것을 생각하니 고민이 됐다.
나는 어렸을 때 건강이 아주 나빴다. 어머니는 20살까지만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살까지 건강이 좋지 않았다. 교회에서 살았던 나는 중학교에 가고 싶어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래 살지는 못하지만 어른이 될 때까지 살게 해주시면 나를 위해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도와드릴 테니까 좀 건강해 해달라”고. 나는 그때 어른이 되는 것이 50살까지 사는 것으로 알았다.
정년퇴직을 하고 철학과 송별회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오늘 늦둥이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는데 사회에 나가서 열심히 여러분과 함께 일할 테니까 좀 도와달라”고 하고 새 출발을 했다. 새 출발을 하고 보니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계속해서 저서를 남기려면 글을 써야 했으며, 대학 강의에 나가고 미국, 캐나다에 있는 한인들을 위해서 강연하기도 했다.
교수로서 4권의 저서는 남겨야겠다고 했는데 한 권은 대학에 있을 때, 나머지 세 권은 70대에 나왔다. 80대가 되면 뭐 늙었다 하는데 그런 생각없이 참 많은 일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30대까지는 나를 위해 인격을 키우며 살았고, 65세까지는 강에 있는 물고기처럼 강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정년퇴직하고 밖에 나와 보니 강에 있던 물고기가 바다에 나온 것 같았다.
일생 동안 제일 소중한 나이가 언제였느냐고 물어보면 60에서 80세까지가 제일 좋았던 것 같다. 그 때가 없었으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50년 동안 함께 일하면서 지낸 안병욱 교수나 김태길 교수도 다 그러했다. 82세가 되어 셋이 만났는데 계란의 노른자에 해당하는 것만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는 나이는 몇 살쯤인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나는 60세는 돼야 나를 믿을 것 같고,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나이도 60세는 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늙는다는 것은 뭔가 성장이 멈추는 것이다. 70세가 되어도 성장하는 사람은 늙지 않고, 40세가 되어도 성장을 못하는 사람은 늙는다. 그러니까 신체가 늙는다고 해서 늙었다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 셋은 틀림없이 60에서 75세까지는 성장했으며, 그래서 75세까지는 절대로 늙지 않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나도 좋은 책들을 다 그때 냈으며, 김태길 교수의 명저인 <한국인의 가치관>도 76세에 나왔다. 그러니까 60에서 75세까지가 인생의 황금기다. 셋이서 이제는 80세가 넘었으니 연장해서 90세를 목표로 노력하자고 했지만 김태길 교수는 90세를 앞둔 89세에, 안병욱 교수는 93세에 세상을 떠났다.
◆인생은 3단계, “계속 공부하고 일을 놓치지 말아야” = 두 친구가 떠나자 늙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내 인생도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미국, 캐나다에 가서 두 달간 교포들에게 강연하게 되었는데 이 주어진 일만 끝나면 편안히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주어진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일이 생겼다. 그래서 95세까지 한번 가보자고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95세쯤 되니까 몸이 달라졌다. 다리 힘도 빠지고 백내장 수술도 받아야 했다. 내가 내 몸을 업고 다니는 것 같았다.
신체가 늙어서 이제는 할 수 없으니 끝내려고 했는데 97세 때에 조선일보를 보니 그 해에 우리나라에서 독자를 제일 많이 가진 책을 쓴 사람 즉 베스트셀러를 쓴 사람 또 좋은 문장을 남긴 사람을 뽑아서 발표를 했는데 나도 한 사람으로 들어가게 됐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보니 나이가 대부분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이었다. 내가 뽑힌 것은 97세의 나이에 역사를 보는 능력이나 사회를 보는 자세였던 것 같다. 아까 말한 대로 강가에 살던 물고기가 바다에 나가서 세계를 보고 그것도 100년을 살았으니 역사적으로 넓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99세 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칼럼을 맡아서 주기적으로 써달라고 요청해왔다. 그러려면 책도 많이 읽고 시사도 알아야 했는데 자신이 없어 사양했다. 100m 경기하고 마라톤하고는 다르니까. 그랬더니 백세의 삶을 쓰면 어떻겠냐 해서, 쓰겠다고 했다. 조선일보에 3년 동안 썼는데 책 두 권이 됐다. 중국어로도 번역이 됐다. 조선일보 칼럼을 끝내고 나서 1년쯤 지나 중앙일보에서도 써달라고 요청이 왔다. 자주 못 쓰겠다고 하니 한 달에 두 번씩만 써달라고 해서 수락하고 지금도 계속 쓰고 있다. 여기에 쓰는 칼럼도 모아 올해 5월에 책을 낼 예정이다.
요즘은 1년이 마치 과거의 10년 같다. 시간의 소중함을 느낀다. 일하면서 사회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일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오래 살겠다는 욕심은 잘못된 것이다.
인생에는 세 단계가 있다. 30세까지는 지식과 인격을 갖춰야 한다. 그 다음에 30년은 직장에서 일하는 기간으로 일하는 목적을 생각해야 하며, 좁은 세상에서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60부터 80세까지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나이다. 80세가 되면 늙는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그건 아니다. 90세가 되어도 육체는 늙었지만 정신은 늙지 않았다. 노력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늙지 않을 것이다.
3단계의 인생에서 젊은 여러분은 지금 일하는 단계다. 일은 왜 하는지,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한 번쯤은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보람 있게 일을 할 것이다.
이 3단계의 인생을 모두 살려면 첫째는 지식은 늙지 않으니까 계속 공부하고 독서해야 한다. 둘째는 일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을 놓치면 인생은 끝이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도시나 농촌이나 늙었다고 해서 노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대학까지 나온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고, 지도자들도 일을 안 하려고 한다. 연세대 김동길 교수가 ‘장수클럽’을 만들었다고 해서 나가보니 장관이나 교수를 지낸 늙은이들의 모임이었다. 나까지 늙으면 안 되겠다 싶어 한 번 나가고 안 나갔다.
◆왜 일을 하는가 =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일의 가치에 관한 인식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수입을 위해 일을 한다. 돈 때문에 일하는 단계를 넘어서면 일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또 한 단계가 있다. 언제가 대구에서 제자가 와서 이번 토요일 오후에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600명 모이는데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에 삼성에서 강연하기로 약속이 돼 있어 못 가고, 다른 좋은 강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하니 꼭 오실 줄 알았다며 아주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삼성에 양해를 구해 허락하면 가겠다고 해서 허락을 받고 대구에 가게 됐다.
삼성에 가면 강사료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고, 대구에 가려면 교통도 불편해 고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교육자로서 이렇게 소중한 일은 평생에 몇 번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생각을 바꾸었다. 강연을 마치고 돌아와서 내 생활의 한 단계 높은 가치를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돈을 위해서 일했다. 앞으로는 돈보다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하는 삶의 방법과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돈을 위해서 일의 가치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지성인의 도리가 아니라는 뜻을 체험하게 됐다. 돈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낮은 차원의 인생을 살게 되어 있으나 일이 귀하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은 그 일의 가치만큼 보람과 행복을 더하게 되어 있다.
나이 80세가 되어서 일의 가치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게 됐다. 일을 왜 하는가, 일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 때의 대답은 ‘일은 이웃과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것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과 이웃에 도움이 된다면 내가 내 돈을 써가면서라도 해야할 일인 것이다. 내가 이웃을 돕는 것만큼 그들이 또 나를 돕게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만 하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된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삶이 귀한 것이다. 그러나 적게 받고 더 많은 것을 베풀면서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보람있고 행복한 삶은 없을 것이다. 수입 때문에 일하는 것은 그 수입이 끝나면 일은 끝난다. 하지만 일이 좋아서 하면 일이 또 다른 일을 만들고 수입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오래 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내가 14살 때 어려운 환경에서 중학교에 합격하자 아버지가 해준 얘기가 있다. “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항상 내 가족만 걱정하고 살게 되면 그만큼밖에 성장하지 못한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언제나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며 살면 너도 모르는 동안 민족, 국가만큼 성장할 수 있다”
학교 교육을 못 받았던 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했던 것은 젊어서 미국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 정신을 키우고 책을 많이 읽어서인 것 같다. 친구인 안병욱 선생과 김태길 선생도 이렇게 살았다.
90세가 넘어 춘천의 한림대학교에서 일송상을 받게 됐다. 수상 소감으로 “상을 받게 된다는 영광스러운 마음은 있었으나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반성해 보았다. 특별한 직책을 맡은 것도 없었고, 남다른 업적을 남긴 바도 없었다. 나보다 훌륭한 분들도 많이 있다. 그래도 내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하고 생각해 보니 한가지가 떠올랐다. ’오래 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였다. 그래서 준다면 받아도 되겠다고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정말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사랑이 있는 고생이어서 행복했다. 나를 위한 고생이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가족을 위한 고생, 직장을 위한 고생, 나라를 위한 고생, 그 고생은 다 내가 사랑했던 것이었다. 내 아들 딸도 사랑하고, 제자들도 정말 나보다 더 사랑하고, 국민들이 좀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고생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