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티비즈 박시현 기자] “경영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기능인 동시에 리버럴 아트다. 경영자에게 리버럴은 ‘아는 차원’에 속하고, 아트는 ‘행동하는 차원’에 속한다. 경영의 리버럴은 앎, 성찰, 지혜, 리더십을 다루는 반면, 아트는 실천, 행동, 결과를 다룬다. 경영자는 지식을 통합해서 성찰하고 실천하며 결과를 냈을 때만, 비로소 경영의 리버럴 아트를 완성할 수 있다.”
미라위즈 대표 송경모 박사가 13일, 203회 영림원CEO포럼에서 ‘AI의 시대, 성찰하는 경영자의 리버럴 아트’를 주제로 강연하면서 던진 핵심 메시지다. 서울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학자이지만 경영의 구루 ‘피터 드러커’의 사상을 접하면서 ‘경영’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뜬 송 박사는 이번 강연에서 AI를 어떻게 경영에 활용할 것인가를 화두로 “AI 시대 경영자는 경영 차원의 리버럴 아트를 알고 행함으로써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강연 내용.
◆ 한 사회가 어떻게 전체주의로 전락하는가?
나는 2024년 11월에 <AI 앞에 선 경영자의 선택 리버럴 아트>라는 책을 냈다. 지식, 예술, 도덕, 소유, 단절, 정의, 사회, 종교, 시간 같은 주제들을 가지고 경영자의 입장에서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에서 이런 주제가 결정적으로 작용하는가를 고민한 책이다.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뭘 하는 사람인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행동과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목적과 가치를 분명히 갖고 일한다면 생활 태도 특히 직업인으로서 자기의 삶은 달라질 것이라는 얘기다.
서점에 가면 경제·경영 코너가 있다. 경제와 경영을 같은 부류로 취급한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자기계발’이 붙어 있다. 뭔가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경영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 현상과 일치시킬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기업 경영자 단체의 이름은 한국경제인협회(구 전국경제인연합회)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업인들은 스스로 경제인이라고 규정하고 거기에 걸맞은 활동을 하고 있다.
피터 드러커(1909~2005)는 경영의 구루, 즉 스승으로 일컬어진다. 이 경영사상가는 20세기 여러 경영사상가 중에서 가장 큰 산맥을 형성했다. 피터 드러커는 경영사상가로 전향하기 이전에 법철학자였다. 그의 첫 저서는 1939년에 출간한 <경제인의 종말>이었는데 한 사회가 어떻게 전체주의로 전락하는가?를 분석했다. 법철학 사상에 의거해 독일에서 히틀러가 득세해 정권을 잡고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파시스트당을 만들어 전체주의를 일으키던 시대를 분석했다. 피터 드러커는 전체주의는 대중의 절망 즉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다고 했다.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마법사 같은 사람이 나타나 한순간에 사회를 탈바꿈시켜주는 리더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인의 종말>의 내용은 매우 방대한데 핵심은 ‘근대 경제주의 세계관이 인간의 자유와 정신성을 오도했다’는 것이다. 세상을 오로지 경제주의에 입각해 분석하고 특히 세상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인간의 자유와 정신성을 오도했고 그 틈을 타 전체주의 리더가 등장해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사람이 등장했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그래서 <경제인의 종말>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피터 드러커는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도피했는데 케임브리지 대학의 유명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만났다. 케인스는 피터 드러커가 워낙 영민한 것을 보고 경제학자가 되어볼 것을 권유했다. 그때 젊은 피터 드러커는 경제학은 별로 연구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경제학은 상품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나는 상품이 아니라 사람을 연구하고 싶다”였다.
피터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을 집필한 후 유명해졌으며 그 이후에 <산업인의 미래>를 펴내며 관심사를 산업사회로 옮겨갔다. 산업인이라는 인간형은 19세기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 유형으로 다시 말해 공장에 출근해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피터 드러커는 이 산업인들로 구성된 나라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자유와 희망 등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이후 제너럴 모터스의 알프레드 피처드 슬론 주니어로부터 제너럴 모터스에 대한 경영 진단을 의뢰받았다. 그래서 피터 드러커는 제너럴 모터스로 출퇴근을 하면서 외부인의 시각에서 회장을 포함한 임원들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과 의사결정을 보고 1946년 <기업의 개념>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바로 이 책의 저술을 계기로 피터 드러커는 경영사상가로 자리잡고, 산업사회의 핵심은 ‘기업’이라고 보고 자신의 연구를 기업에 집중했다.
◆ “자유로운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와 기능 부여하는 게 기업의 역할”
피터 드러커가 펴낸 <기업의 개념>은 현대 경영 사상의 초석을 이룬 최초의 책으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 이전에 경영학이 없었던 게 아니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현대 경영학에 준하는 여러 독립 지식들이 있었다. 회계, 생산관리, 물류관리, 재무, 판매, 행정관리, 법무 등 이 모든 지식들이 이미 학문으로서 성립돼 있었으며, 이런 것들을 통합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20세기 초에 경영학 연구자들은 이 신생 융합 학문에 대한 이론적 정체성을 경제학에서 찾았다, 20세기 초에 여러 학문 분과에서 기업을 연구 주제로 다루고 있던 유일한 학문이 경제학이었다. 그 중에서도 신고전파 경제학은 한계 이론에 바탕을 두고 기업의 수학적 이익 극대화 모형을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경영학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기업의 목적은 이익 극대화’라고 했으며, 이러한 이론은 경영학 이론서와 대학 교과과정에서 적극 채택되면서 확산됐다. 이는 현실 사업가들의 표면적 동기와도 일치한다. 사업가들은 “돈 벌려고 사업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드러커는 <기업의 개념>에서 기업은 두 가지의 속성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고 봤다. 하나는 경제적 기구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기구다. 기업은 수익을 발생시켜야 존재할 수 있다는 경제적 기구라는 관점은 그렇다 치고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사회적 기구라는 또하나의 관점이다. 사회적 기구라는 것은 자유로운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와 기능을 부여하는 역할을 기업이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지만 산업사회 이전에는 어떤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와 기능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 것은 태어난 출신 성분이었다. 여기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말은 매우 인문학적이다.
드러커는 <기업의 개념>에서 귀족과 성직자들이 지배하던 구대륙 유럽 사회에서 귀족이나 성직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절망이 아메리칸 드림으로 해소됐다고 얘기한다. 드러커의 설명에 따르면 18세기 이래 아메리칸 드림은 유럽인들에게 ‘일종의 신약(promise)’이었다. 바다 건너에 아메리카 대륙에는 귀족이 없다는 것은 유럽인들한테는 어마어마한 희망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미국은 19세기 후반부터 막 생기기 시작한 기업을 통해서 구원에 대한 믿음을 형성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회였다.
드러커는 자유로운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와 기능을 부여하는 역할을 얘기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을 처음 내놓는다. 그는 기업의 경제적 역할은 필수적이지만 여기에만 머물면 기업은 자신의 소명 즉 사회적 기구로서의 소명을 다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의론을 얘기한다. 자유로운 개인에게 어떤 식으로 합당한 지위와 역할을 부여하고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것인가를 정의의 문제로 봤다.
◆ 경영에 리버럴 아트와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피터 드러커가 1954년에 낸 <경영의 실제>는 기념비적인 책이다. 이 책에서 피터 드러커는 ‘사업의 목적은 이익 극대화가 아니라 고객 창조이다’라고 말한다. ‘고객 창조’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경영자들 사이에서 상식이 됐다. 드러커는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는데 목적과 수단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이익은 기업이 필수적으로 행해야 할 의무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드러커는 이 책에서 한 사회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경영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했다. 자원, 자금, 노동력, 지식 등이 기본적으로 필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영이라며, 경영의 중요성을 그만큼 부각시켰다. 또 경영은 고도의 전문 지식이라고 했다. 전문 경영은 누구나 구사할 수 있는 평범한 지식이 아니라며 최고난도의 곡예(acrobatic feat)에 비유했다. 곡예를 보면 어떻게 저런 동작을 하지 경탄을 하는데 곡예사는 이 동작을 이루기 위해서 엄청난 훈련을 했을 것이다. 경영은 이 정도로 어려운 과학이다. 오랜 훈련과 학습, 균형 유지 그리고 전체를 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경영대학에서는 경영관리, 국제경영, 재무금융, LSOM, 마케팅, 회계 등의 과목들을 배운다. 경영학의 주요 커리큘럼이다. 이것들을 공부하면 경영지식이 생기는가? 리버럴 아트와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스티브 잡스는 2011년 아이패드 2를 출시하면서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세상을 흔들어 놨다. 애플의 DNA는 리버럴 아트와 결합되고 인문학과 혼인한 기술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이 얘기를 한 후에 갑자기 우리나라에서 리버럴 아트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고 이건희 회장은 경영학 책은 잘 보지 않고 주로 인문학 책을 보면서 경영의 아이디어를 거기서 찾아냈다고 했다. 피터 드러커 본인도 경영학 책은 별로 읽지 않고 문학, 사회, 역사, 과학, 예술 분야의 책들을 계속 읽으면서 자기의 경영 사상을 도출했다. 실제로 드러커의 여러 저서들을 유심히 보면 경영사상가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많지 않고 주로 철학자, 자연과학자 등 경영 아닌 분야의 책들이나 사상을 언급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201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는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출판계에서는 시 읽는 CEO, 오페라 읽는 CEO, 철학 읽는 CEO 등 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책들이 쏟아졌다. 또 고전 읽기가 유행하고,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자들의 특강, 더 나아가 공연 관람이나 문화 예술 체험 등이 펼쳐졌다. 그런데 이런 인문학적 활동들에는 인맥 넓히기나 과시욕과 같은 허세도 좀 작용했다. 경영자가 인문학을 대할 때 단순히 인맥을 쌓고 자기 포장용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텍스트만으로도, 현장만으로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41)는 일본 근대 자본주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메이지 유신 시대 이후에 수많은 기업들을 설립했고 일본에 금융 시스템, 자본시장, 증권거래소 등이 도입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2024년에 일본 1만엔 짜리 지폐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로 일본 사회에서 추앙을 받는 위인이다. 일본이 그동안의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찾은 아이콘이었다. 이전 1만엔권의 인물은 메이지 시대의 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논어와 주판>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많이 읽혔는데 기업 경영의 핵심 요체가 ‘논어’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어를 수백 번 통독하면 경영 지식이 생기는가? 조선시대는 논어를 암송하다시피 공부한 선비들로 가득찬 사회였지만 거기서 근대 자본주의가 나온 것은 아니잖은가. 이 대목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지식의 상호작용이다.
지식에는 업역 지식과 추상 지식이 있다. 업역 지식은 도메인 지식으로, 실행에 필요한 실무 지식이다.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려면 그 분야에 필요한 지식이 있다. 특정 장비나 소프트웨어를 다루거나 자재나 상품, 고객을 알아야 하는 지식이 업역 지식이다.
추상 지식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의 특성을 추상적으로 집약한 지식이다. 예를 들어 ‘인사가 만사다’라는 말은 다른 걸 아무리 잘해도 결국 사람을 어떻게 채용해서 어떻게 쓰느냐가 모든 일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추상적 지식은 상징과 비유로 이뤄져 있다. 각종 고전, 경전, 속담, 위인들의 말들이 그것이다. 논어를 수천 번 읽었다 하더라도 업역 지식이 생기지는 않는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업역 지식을 쌓은 후에 다음에 거기에서 추상되어 나오는 지식을 논어 속에서 발견했다. 출발은 업역 지식이며 거기에서 추상 지식이 나온다는 얘기다.
베토벤은 “손가락이 아니라 마음으로 연주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피아노를 탁월하게 치기 위해 피나는 훈련을 하며 쌓은 업역 지식이 뒷받침되어 나온 말이다. 일을 실행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의 경험을 쌓았느냐에 따라 그 일을 느끼는 차원은 전혀 다르다. 업역 지식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일의 진가를 느끼는 때가 온다. 박세리 선수는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고 나서 인터뷰를 하면서 “이제야 골프가 뭔지 좀 알 것 같다”고 했다.
피터 드러커는 이 업역 지식과 추상 지식을 현장 지식과 사고 지식으로 얘기했다. 경영자라면 반드시 현장 지식과 사고 지식의 상호작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드러커의 지론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경영 원리는 현장에서 나왔으며 학계에서 나온 것은 별로 없다”라면서도 “현장 지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고 지식을 통해 이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했다. 현장을 모르는 지식인들이라고 깔보지 말고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되 항상 지식인들이 했던 얘기를 내 일에다 반추해서 거기에서 다시 한번 자기의 지식을 강화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을 대하는 태도이며 리버럴 아트의 역할이다.
텍스트만으로도, 현장만으로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기본적인 앎의 수준이 형성되어 있어야 질문을 할 수 있다. 초등학생은 대학생 수준의 질문을 할 수 없으며, 특정 업역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거기에 맞는 질문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 ‘질문’은 일만 열심히 한다고 해 생기는 게 아니다. 본인이 사고 지식을 자꾸 접하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은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성찰하는 습관을 들여야만 가능하다.
어떤 일을 해내기 어렵거나 고전이 읽기 어려운 이유는 아직 근육이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은 방대하게 연결된 근섬유 네트워크와 같다. 이 근육이 올바르게 형성되기 위해서는 경험이 쌓여야 된다. 그 경험도 그냥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현장 지식과 사고 지식 사이에 상호 반추가 있어야 된다.
◆ “경영은 인문학의 과업을 현장에서 구현하는 행위”
피터 드러커가 바라본 경영의 본질은 지식을 생산적으로 만드는 활동이며, 사회적 기능이며 그리고 리버럴 아트였다. 드러커는 1989년에 펴낸 <새로운 현실>에서 리버럴은 깨닫는 것이며, 아트는 실천해서 결과를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리버럴은 인식과 지혜를, 아트는 응용과 연습과 창조를 추구한다.
이 대목에서 경영의 뉴 노멀을 말하고 싶다. 경영은 경제적인 어떤 이익을 구현하는 활동이기도 하지만 인문학의 과업을 현장에서 구현하는 행위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경영의 여러 지식들을 포기하거나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며, 극복하고 지양해야 한다. 경영의 과업은 인문학의 궁극적 지향점과 동일하다. 진리, 자유, 정의, 아름다움, 행복, 헌신, 초월, 창조 등이 그것이다. 지식인들은 이 문제를 그냥 언어로만 다루고 끝나지만 경영자들은 이것을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경영 지식은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는 숙명을 안고 있다. 경영 환경은 경영자의 기존 지식이 끝없이 오류임을 드러내는 메커니즘이다. 이를테면 A영역에서는 통했지만 B영역에서는 안 통한다. 또 어제는 통했지만 오늘은 안 통한다. 얼마 전에 올리브영 사례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소개됐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화장품 사러 올리브영에 가지 않고 다이소로 간다. 불과 1년 사이에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 다이소 모델도 또 언제 또 폐기될지 모른다.
모든 경영 환경은 기호다. 기호는 텍스트, 이미지, 음성, 소리, 사건 등 기표(signifier)와 숨겨진 메시지인 기의(signified)로 이뤄져 있다. 경영자는 기호를 읽는 훈련을 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영자가 메시지를 읽는데 실패한다. 아는 범위 내에서만 알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이다. 이 기호를 읽는 능력을 강화해주는 것이 리버럴 아트다.
신보수주의 정치절학자 레오 스트라우스는 고대 이래 위대한 사상가, 철학자, 문필가는 자신의 의도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노골적으로 썼다가는 대중의 오해와 핍박, 권력의 탄압을 받을까 봐 살짝 돌려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영 환경이라고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본뜻을 숨기는(esoteric) 텍스트다. 이를테면 시장의 변화라든지 사람들의 행동 등은 절대로 자신의 본뜻을 경영자에게 드러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을 찾아내는 일은 경영자의 몫이다.
유능한 경영자들은 누군가는 그냥 지나친 현상을 캐치해 낸다. 이런 능력은 평소에 인문학적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냥 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경청의 리더십이라는 것이 한때 유행했다. 인문학을 좀 훈련한 사람들이라면 경청의 리더십이 얼마나 사람들을 오도하는지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물론 당연히 경청해야 한다. 하지만 경청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경청해도 무엇이 진실인지 잘 들리지 않는다.
두가지 예가 있다. 하나는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의 파워포인트에 관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피스웨어를 만들 때 워드프로세서나 스프레드시트는 포함됐지만 파워포인트는 없었다. 임원들이 프리젠테이션 전용 소프트웨어인 파워포인트를 넣자는 의견에 빌게이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무시했다. 그러다가 임원들이 계속 얘기하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겠네“라며 파워포인트를 끼워놓았으며 결국에 이 사업은 대박이 났다.
그 반대 예는 이병철 회장 얘기다. 1983년 이 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하자 삼성 내부 임원진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정부 관계자들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대했다. 가전제품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반도체를 만드는 것은 너무 위험하고 시기상조라는 주장이었다. 임원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이 회장과 함께 반도체 사업을 추진한 이건희 부회장은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의 지분을 인수했다. 여기서 시사하는 것은 본인이 메시지를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오랜 기간 훈련과 학습을 통해서 남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빨리 캐치해 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경영자의 본원적 무지는 숙명이다. 그 현실적인 대안으로 피터 드러커는 ‘목표와 자기 통제에 의한 경영(MBOS)’을 주장했다. 그는 한 가지의 ‘맞음’이 계속 통용된다는 보장이 없으며, 그래서 계속 목적, 목표, 성과를 주기적으로 재확인해서 피드백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동력은 질문하는 능력에 있다.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피드백하려면 ‘왜 꼭 이 방식으로 해야만 되는가?’, ‘우리의 고객은 누구인가?’, ‘우리가 달성한 성과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이 일을 해내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등에 대해 질문하는 습관이 있어야만 한다.
◆ ”질문하고 성찰해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찾아야“
인공지능에 대해 몇 가지만 얘기해 보겠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결과물은 본질상 원재료이다. 경영은 원재료에 그 이상의 가치를 부가하는 행위다. 인공지능의 결과물도 부가가치를 부과하는 행위를 누군가 해줘야 한다. 이 일은 경영자만이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지식 노동자의 신종 자본재이다. 초고성능의 다이내믹한 사전과 다를 게 없다.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는 사람은 ’아웃라이어‘일 것이다. 인공지능은 기본적으로 확률적으로 가장 발생 가능성이 높은 토큰을 배치하는 시스템이다. 평균화되고 관행화된 지식은 AI로 흡수될 것이다. 이 모범 답안에서 벗어난 생각을 할 줄 알고 그 쪽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기회가 있는 세상이 올 것이다.
오프라인이나 아날로그, 고풍에 대한 욕구는 다른 형태로 살아날 것이다. 가령 휴머노이드 유모와 사람 유모가 있는 세상이 온다면 저소득층들은 휴머노이드를 쓰고, 고소득층들은 잘 교육받은 훈련된 사람 유모를 쓸 것이다.
AI는 업무를 해주는 것이지, 경영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업무라는 것은 경영이 이걸 해야한다고 부여했을 때야 수행 가능하다. 모든 업무 체계는 결국 최상위의 ’경영 행위‘에서 출발해서 형성된다. 경영은 결코 업무일 수도 없도 업무여서도 안된다. 업무의 완전 자동화는 가능해도, 경영의 완전 자동화는 불가능하다.
수필가 피천득은 ”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해 나가고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가고 한가한 사람이란 시간과 마주 서 있어 본 사람이다“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했다. 성찰하는 삶은 철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일에만 매몰된 삶은 경영자와 지식 노동자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특히 요즘처럼 불확실성이 심한 시대는 더욱 그러하다. 또 맨날 독서하고 강의만 들으러 다닌다고 해서도 길은 나오지 않는다. 현장 지식과 사고 지식 중에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절대로 유의미한 결과를 내는 길을 찾을 수 없다. 길은 오직 성찰을 통해서만 나오고, 질문은 자기 자신을 성찰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19세기나 20세기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최고였지만 지금은 질문하고 성찰해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찾아야 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다.
◆영림원CEO포럼
영림원 CEO포럼은 2005년 10월 첫 회를 시작하여 매달 개최되는 조찬 포럼으로, 중견 중소기업 CEO에게 필요한 경영, 경제, IT, 인문학 등을 주제로 해당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강연한다.